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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방편품

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⑪

by 민간인김대희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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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생명력을 현실 속에서 실증

 

 설해진 말 자체는 설할 수 없는 진실과 비교하면 방편이다. 그러나 중생이 그 말로써 구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비롭기 때문에 부처가 수자의(髓自意)로 전민중을 향해 설한 법화경의 말. 그것이 비묘방편이며 이미 그것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부처의 지혜와 일체인 방편이다.

 니치렌대성인이 법화경의 문자에 대해 "문자즉실상(文字卽實相)이고"(어서 383쪽)", "법화경의 문자는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字) · 일자(一字)는 일불(一佛)이니라"(同 971쪽), "법화경의 문자를 배견하심은, 생신(生身)의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만나 뵈옵는 것이라 생각하시라"(同 1122쪽) 등으로 반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도 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경의 방편과 법화경의 방편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편이란 산스크리트어의 원의(原義)로는 '다가가다'라는 의미이지만 이전경은 사람들을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다가서게 하는 방향이다. 중생이 부처의 지혜에 가까이 가는 방향이다. 그것이 법용 · 능통의 두 가지 방편이다. 이것은 법화경에 이르면 소용없는 방편이다.

 그에 비해 법화경은 부처의 지혜 그 자체를 수자의로, 현실세계를 향해 설명하고 표현해 간다. 부처가 중생의 세계로 다가서는 방편이 된다. 이것이 비묘방편이다.

 이 법화경의 힘으로 인해 이전경도 그 진실의 일분(一分)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개회(開會)"라고 한다.

 방편품에서 밝혀진 제불의 지혜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며 바꾸어 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이다'라고 하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비묘방편의 '비(秘)'이다.

 또 중생으로서는 쉽게 알기 어려운 고로 '묘(妙)'이다.

 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이다'라는 진리에 눈뜨게 하는 가르침이 "비묘방편"이다.

 

 

◆ "우리들이 범부인 것이 비묘방편"

 

 를 들면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제 8에 설해진 "의리주(衣裏株)의 비유"도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남자가 친구에게 무상(無上)의 구슬을 옷 속에 꿰매어 주었지만, 친구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의식(衣食)에 괴로워한 끝에 그 남자와 재회하여 비로소 자신이 보배를 갖고 있었다고 깨닫는 이야기가 설해져 있다.

 자신이 본래, 보배(흉중의 불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남자(부처)는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본인(구계의 중생)은 깨닫지 못했다.

 범부가 그대로 부처이다. 이것은 알기 어렵다.

 믿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비(秘)'이다. 그러나 깨달으면 '비'가 되지 않는다. '묘(妙)'한 힘이 나온다.

 도다선생님은 "우리들이 다만 범부로 있다는 것은 비묘방편이며, 진실한 부처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자각한다면 비묘방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부처이지만 범부로 태어난다. 그것은 인간혁명(人間革命)하여 묘법을 증명하고 그 모습을 보이면서 광선유포를 해가기 위해서이다. 처음부터 건강하고 부유하며 모든 것이 윤택하다면 사람들은 묘법의 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굳이 범부의 모습으로 고생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비묘방편이다.

 

 

생활에 승리, 신심에서 승리

 

 요는 말법의 법화경인 어본존을 믿고, 구계의 현실 속에서 싸우는 여러분들의 모습이야말로 비묘방편이다.

 어본존을 근본으로 끝까지 살아간다면 어떠한 고뇌도, 불계를 강하고 깊게 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든 일이 묘법의 힘을 나타내는 방편이 된다.

 

 

◆ "끝까지 살아가라 인생을 극과 같이"

 

 "인생은 극(劇)과 같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상업으로, 어떤 사람은 교육계에서, 어떤 사람은 가정인으로서 라고 각자의 극을 연기하고 있다.

 '역(役)' 그 자체는 방편이다. 그러나 배우는 역(役)이 끝나버리면 그 이외에 사명은 없다. 역을 연기할 때가 자신의 진실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때이.

 생활즉신심이다. 불계라고 해도, 현실의 구계의 무대에 입각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쪼록 이 인생이라고 하는 무대에서 훌륭한 인간혁명의 드라마를 완벽하게 연기해 주시기 바란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숙명에서 사명으로, 고뇌에서 상락으로 이 다이나믹한 전환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불법의 생명은 대화에

 

 "사리불, 내가 성불하고 난 이래 여러가지 인연, 여러가지 비유를 가지고 널리 언교(言敎)를 말하고, 무수한 방편을 가지고 중생을 인도하여"

 불법의 생명선은 '대화'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부처와 똑같은 영지(英智)(불지견(佛智見))를 연다. 이것이야말로 부처의 근본목적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불법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방을 근본적으로 존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처의 싸움-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대화의 싸움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라고 생각하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간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에 끈질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언교를 말하고, 무수한 방편을 가지고 중생을 인도하여"의 경문은, 부처가 종횡무진한 대화로 민중을 인도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석존도 니치렌대성인도 인간군(人間群)의 한가운데에서 대화로 법을 넓히셨다.

 그리고 마키구치선생님, 도다선생님도 대화와 좌담의 달인(達人)이셨다. 상대방이 서민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언제나 당당한 신념의 '대화의 역사'를 남기셨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대화의 힘이다. 성실한 대화는 차가울대로 차가워진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햇빛이다. 명쾌하고 확신있는 말은 미혹의 구름을 걷어내는 새로운 바람이다. 불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방의 생명을 변혁시키는 원천이 된다.

 상대방을 구하기 위한 자비의 대화. 진지한 승부의 대화. 상대방이 마음에 느끼도록 부처는 지혜를 다하고 연구를 다했다. 그것이 "종종(種種)의 인연, 종종(種種)의 비유"이다. 즉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라는 '내력'(인연)을 설하고 알기쉽도록 '비유'를 구사하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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