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한 불지혜(佛智慧)를 찬탄
"사리불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불(諸佛)의 지혜(智慧)는 심심무량(甚深無量)하니라.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難解難入)이니라. 일체(一切)의 성문(聲聞)과 벽지불이 알지 못하는 바이니라'
석존은 말문을 열자마자 사리불에게 "제불의 지혜는 심심무량하다.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그대들 성문이나 벽지불은 도저히 알 수 없다:라고 설했다. 이것은 부처의 위대한 지혜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제불의 지혜'란 부처의 내면에 태양과 같이 빛나는 지혜이다. 그것이 "심심무량"하다고 찬탄하고 있다.
"심심(甚深)"이라고 찬탄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가 생명 근저의 진리에 까지 깊이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무량(無量)"이란 지혜의 빛이 널리 일체를 비추어내기 때문이다.
부처의 지혜는 종(縱)으로 높고 깊으며, 횡(橫)으로 널리 생명의 모든 것을 비추어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의 경애는 광대심원하다고 설하시는 것이다. 천태(天台)는 이것을 "뿌리가 깊으면 가지는 무성하다 "수원(水源)이 멀면 강의 흐름도 길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부처만이 위대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부처와 똑같이 위대한 지혜를 생명에 빛나게 하여 행복해지시오' 이렇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야말로 행복의 원천
지혜야말로, 영지야말로 행복을 위한 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본고(苦)를 초월하느 것은 돈도 처세술도 지위도 아니다. 우리들의 생명에 본래 갖추어진 영지(英智)를 열 수밖에 없다.
민중의 마음에 최고의 영지를 열게 하고,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대도(大道)를 걸어가게 한다. 그것이 법화경의 목적이다. 대성 인도 "마음의 재(財)가 제일이로다."(同 1173쪽)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최고의 영지인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難解難入)인라"라는 글월도 부처의 지혜를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찬탄하는 가도가 앞에서와는 조금 다르다.
"지혜의 문"이란 부처의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다. 부처가 여러 가르침을 설하는 것도 이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불법은 법화경 이전에 사람들의 온갖 기근에 맞추어 여러 가르침을 설했다. '인생은 고(苦)이다' '일체는 무상(無常)이다' '번뇌를 없애버리면 安樂하다' '연기(緣起)를 깨달아라' 등등.
이와 같이 중생의 온갖 기근(機根)에 응하여 적절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에 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가르침 자체는 부처의 목적이 아니었다. 목적은 지혜의 길, 성불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었다.
성문(聲聞)이나 벽지불(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의 지혜로써는 그러한 부처의 목적을 알 수 없다. 가르침의 내용 자체는 일단 이해할 수 있어도 무엇을 위해 설하셨던가 라는 것은 알 수 없다.
무상관(無常觀)이라든가 번뇌(煩惱)의 멸각(滅却) 등 개개의 가르침에 만족해서는 그것을 설한 부처의 지혜의 세계, 그 자체에 들어갈 수 없다. 말하자면 문 앞에서 멈춰 버린다. 그러므로 난해난입(難解難入)이라 설하고 잇는 것이다.
◆"신심"이 부처의 경애에 이르는 "문"
이상이 문상(文上)의 의미이다. 도다 선생님은 이 문(文)을 문저(文底)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읽으셨다.
-"제불(諸佛)의 지혜는 심심무량(甚深無量)하니라"란 南無妙法蓮華經의 지혜가 심심무량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難解難入)하느라"란 어본존을 향한 '신심의 문'이다. 신(信)으로써 지혜를 대신하기 때문에 '지혜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문이 난해난입이다-라고.
대성인이 "지혜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어서 725쪽)라고 말씀하셨듯이 南無妙法蓮華經에는 모든 부처의 심심무량한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南無妙法蓮華經의 지혜에 들어가는 문이란 '신심의 문'이다. 대성인은 "문(門)이란 신심을 말함이니"(어서 715쪽)라고 말씀하셨다.
어본존을 믿고 대성인의 말씀 그대로 행학(行學)의 실천에 힘쓴다면 "이신대혜(以信代慧)"(신심으로써 지혜를 대신한다)의 원리에 의해 최고의 행복경애를 열어갈 수 있다. 이것이 '신심의 문'에 들어가서 일생성불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거친 파도를 만났을 때, 그 신심을 관철하는 것은 어렵다. 신심이 지혜의 문이라는 것을 이조 푸념의 마음을 일으켜 거친 파도에 농락당하기도 한다. 고(苦)를 두려워 하고 낙(樂)에 안주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신심의 문'도 역시 난해난입이다.
그래서 대성인은 "고(苦)는 고(苦)라고 깨닫고 낙(樂)은낙(樂)이라고 열어서 고락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어서 1143쪽)라고 말씀하셨다.
南無妙法蓮華經는 모든 부처의 지혜의 원천이다. 그리고 근행·창제는 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 부처의 생명의 대해(大海)에서 지혜를 퍼내가는 '원초(元初)의 의식'인 것이다.
"무문자설(無問自說)"의 설법
삼매(三昧)에서 일어선 석존은 누구에게 요청받은 일도 없이, 스스로 법을 설하기 시작했다. 질문이 없는데 부처가 자신의 의지로 법을 설하는 것을 '무문자설'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질문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법문(法門)을 석존은 스스로 유연하게 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하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지혜와 지비의 용솟음이 거기에는 있었다.
법화경이 이 '무문자설'의 형태를 띠고 설해진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제경(諸經)은 부처의 진의(眞意)를 다 밝히지 않고 중생의 기근(機根)에 따라서 설해진 '수타의(隨他意)'의 경(經)이다. 이에 비해 법화경은 부처가 자신이 깨달은 그대로 진실한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수자의(隨自意)'의 경이라고 한다.
◆어본불이 "수자의의 대투쟁"을 개시
대성인의 입종선언(立宗宣言)도 또한 '무문자설'이셨다. 입종(立宗)에 즈음해서 "말하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나리라고 알았노라."(어서 200쪽)라고 말씀하셨다. 묘법을 넓히면 반드시 박해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南無妙法蓮華經를 설하기 시작하셨다. 대성인의 생애에 걸친 싸움은 '수자의'의 실천이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실천으로 말하면 '수자의'란 위대한 묘법이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말하던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찬탄의 마음'이다. 묘법에 대한 찬탄이야말로 법화경 독송의 근본이다.
또 일문 일구(一文一句)라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치지 않을 수 없다는 수력 홍통(隨力弘通)의 자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이야기한다든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좋게 생각할 것이라든가 하는 사고방식은 '수타의'이다.
넓게 말하면 '무문자설' '수자의'란 '주체성'이며 '자발 능동'이다. 소박해도 좋다. 말솜씨가 없어도 좋다. 상대방을 구제하겠다 라는 일념으로 열심히 기원하고, 불법의 훌륭함을 자신의 말로 확신을 갖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간다. 이것이 법화경의 정신이다. 또 '학회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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