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성불"의 불법
"부처는 이전에, 백천만억(白千萬億) 무수(無數)의 제불(諸佛)에 친근하여 남김없이 무량(無量)의 도법을 행하고"
이 경문에 나타난 '성불관(成佛觀)'에 대해 한마디 말해 두고자 한다.
이 경문에서는 부처가 과거에 상상을 초월하는 장원(長遠)한 기간, 생사(生死)를 되풀이하며, 무수(無數)한 부처를 섬기고 수행한 것을 불인(佛因)으로 하여 그 결과로 존극(尊極)의 불과(佛果)를 얻었다고 되어 있다. 이 수행을 "역겁수행(歷劫修行)"-겁을 지나는 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적문(迹門)에 있어서 일왕(一往)의 불인(佛因)·불과(佛果)에 지나지 않는다.
◆제불의 역겁수행의 공덕이 갖춰지다
도다 선생님은 문저의 입장에서 읽을 때는,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는 부처(어본존)는 백천만억의 제불을 태어나게 능생(能生)의 근원이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난행(難行)·고행(苦行)도 없이,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백천만억의 제불에게 친근한 이상의 공덕이 있다. 또 그것이 남김없이 제불의 무량의 도법을 행한 것이 된다-라고.
南無妙法蓮華經는 모든 부처의 '능생(能生)의 근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의 부처를 성불시킨 근본 원인은 역겁수행이 아니라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는 근원의 법을 각지(覺知)한 것에 있다. 그 南無妙法蓮華經를 바로 수지하는 것이 말법의 불도수행이다. 그러므로 대성인의 불법에 있어서는 역겁수행이 필요 없다.
니치렌(日蓮)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觀心 本尊抄)」에서 "석존의 인행과덕(因行果德)의 이법(二法)은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에 구족(具足)하도다. 우리들이 이 오자(五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어서 246쪽)라고 말씀하셨다.
◆성불관(成佛觀)의 혁명 "수지즉관심(受持卽觀心)"
석존을 비롯한 삼세시방의 제불이 성불을 목표로 하여 수행한 '인행(因行)'도, 그 '과덕(果德)'도 모두 南無妙法蓮華經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 묘법 오자를 수지하는 속에, 자연히 석존 등의 제불의 인과의 공덕이 갖추어져 성불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지즉관심(受持卽觀心)"-수지가 즉 관심(성불의 뜻)이 된다-라고 한다,
또 "즉신성불(卽身成佛)'(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이라고도 "직달정관(直達正觀)"-바로 정관(부처의 지혜, 경애)에 도달한다-라고도 말한다.
대성인은 이 묘법을 수지한 사람은 "석존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同 1443쪽)라고 하셨다.
대성인의 불법에 의해 '석존과 같은'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는 길이 만인에게 열려졌던 것이다. 성불이라고 해도 먼 미래나 가공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성인의 불은 만인의 '일생성불'(일생동안에 성불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지즉관심"은 성불관의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다 선생님은 "몇천만년이나 수행해 온 방편품의 부처들보다도 우리들은 어본존을 믿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단 한마디를 부르는 것만으로써, 부처가 되는 수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도 말했다.
한번의 창제에도 무량한 공덕이 있다. 제불이 기나긴 시간에 걸쳐 몇번이나 바꾸어 태어나 수행하여 얻은 공덕을 우리들은 잠깐사이에 남김없이 얻을 수 있다. 이만큼 위대한 묘법이다.
먼 저쪽에 있는 '성불'이라고 하는 정상(頂上)을 목표로 하여 한결같이 산길을 계속 올라간다. 이것이 보통의 성불관이라고 한다면, 니렌(日蓮)대성인의 불법은 만인을 빠른 시간에 정상에 오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위의 산들을 멀리서 내려다 보고 삼백육십도 열려진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관망하는 듯한 경애. 이 넓디 넓은 부처의 경애로,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현실 속에 뛰어들어 이 경애에 선 기쁨을 끝까지 말해 간다. 이 실천이야말로 대성인 불법의 제호미이다.
나날이 도전하는 불도수행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명칭이 널리 알려지셨느니라"
이 경문은 이전·적문의 부처의 수행이 나타나 있는 문인데, 동시에 우리들의 신심 상에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먼저 "용맹(勇猛)"이란 '신심'이다. 니치칸상인은 「육권초(六券抄)」에서 "용감하게 함을 용(勇)이라 하며 지(智)를 다하는 것을 맹(猛)이라 한다"라는 석(釋)을 인용해 용감하게 '신력(信力)'을 힘쓰는 것이 "용맹"이라고 말씀하셨다.
결의하여 용감하게 끝까지 행하는 것이 불도수행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용감하게 도전해 가야만 수행이 성취된다.
용맹심이 없으면 숙명의 쇠사슬은 끊어버릴 수 없고 장마(障魔)를 타파할 수도 없다. 우리들의 불도수행인 근행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 도전과 창조의 드라마이다. 신심으로 용감하게 서면 절망과 불안의 어둠이 사라지고 희망과 전진의 빛이 비친다. 이 '용감하게 일어서는 마음'이야말로 '신심'이다.
◆ "신심"과 "행동"-용맹정진의 사람만이 부처로
또 "정진(精進)"이란 자행화타에 걸친 제목(題目)의 실천이다. 용맹심이 있어야만 정진의 모습이 나타난다.
니치칸상인은 "무잡(無雜)이기에 정(精), 무간(無間)이기에 진(進)"이라는 묘락(妙樂)의 말을 인용하여 창제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무잡"이란 불순물이 없이 순수한 것. "무간"이란 끊임없이 항상 실천하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창제의 실천에 있어서 순수하게 끊임없이 나날이 지속하는 것이 중요다. 그래야만 우리들의 생명연마, 일생성불의 수행이 된다.
대성인은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라"(어서 790쪽)-일념에 억겁에도 필적하는 노력을 다면 본래 나의 몸에 갖추어진 무작삼신의 부처의 생명이 순간순간 일어난다. 실로 南無妙法蓮華經란 정진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부르는 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의 흉중에 무작의 삼신, 즉 부처의 무량한 지혜와 자비가 염념에 용현한다.
용맹정진의 '신심의 일념'이 그대로 '부처의 일념'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앞에 말한 "수지즉관심"이다
바꾸어 말하면 용맹정진의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대성인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이 용맹정진의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발전해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용맹정진이란 '진지(眞摯)의 두자이다.
나는 어느 해외 저널리스트로부터 "학회가 크게 발전한 이유"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것은 '필사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벗을 위해 사회를 위해 평화를 위해 오직 진지하게 열심히 행동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광선유포의 위대한 전진이 있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마키구치선생님께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가를 어떻게 하면 판단할 수 있느냐 질문했다. 마키구치선생님은 "세계 최고의 종교를 목숨 걸고 수행한다. 그 노력과 용기가 으면 알 수 있게 된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또 "용맹정진하시오. 실행이다. 정진이다. 늙기는 했지만 나도 실천하고 있습니다"라고도 말씀하셨다.
참으로 "용맹정진"이란 학회정신의 원류(源流)이다. 용감하게 도전하는 데에 생명의 약동도 있고 지혜도 생긴다. 거기에 환희가 있고 희망이 용솟음친다.
순간 순간 자기완성을 향한 인(因)을 끊임없이 거듭해가는 용맹정진의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승리자이다.
각자가 사자왕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또 넓디넓은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바로 용맹정진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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