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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방편품

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⑧

by 민간인김대희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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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 속에 "빛나는 보탑"을 세운다

 

 도다 선생님은 "심심미증유의 법을 성취하고"라는 경문에 대해 "문저하종(文低下種)의 대어본존을 나의 몸 안에 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심심미증유의 법"이란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우리들의 이 생신(生身)의 몸, 이 현실의 생명상에 현현하는 것이다.

 유명한 아쓰보어서에는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寶塔)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同 1304쪽)-귀천상하에 관계없이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대로 그 몸이 보탑이고, 또 다보여래이다-라는 말씀이다.

 '나의 몸' 속에 南無妙法蓮華經의 보탑을 세우시오···라고. 그것이 심심미증유의 법을 성취하고'의 경문에 담긴 마음이다.

 석존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만인이 '심심미증유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만인이 자기 몸에 보탑을 세우고 보탑의 당체로서 찬연하게 빛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빛나는 생명의 보탑이 이 지구상에 무수하게 나란히 세워져 간다. 이것이 대성인 불법에 있어서 "성취심심 미증유법"의 실증이다.

 '일찍이 없었던 대법(大法)'에 의해 인류사에 '일찍이 없었던' 여명을 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미증유의 법'이므로 그것을 넓히려면 '미증유의 행자(行者)' '미증유의 지용의 자'가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다 선생님은 "우리들은 미증유의 광선유포를 위해 대지에서 솟아 나온 학회의 자식이며 지용의 보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도다 선생님의 마음을 계승하여 '미증유의 실천'에 매진해 온 분이 여러분이다.

 이 '미증유의 광선유포'를 추진해 온 공덕도 또 무량무변한 '미증유의 복덕'이라는 것을 확신해 가야겠다.

 

 

대성인의 "의취(意趣)"를 학회가 실천

 

 "의당(宜當)함에 따라 설하신 바의 의취(意趣)는 이해하기 어렵도다"

 부처의 '지혜의 문이 난해난입인 이유를 말하고 있는 일절(一節)이다.

 결국,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은 구계의 중생의 여러 기근에 맞추어 설해진 것이지만 그 '의취', 즉 부처의 '진의(眞意)'는 아직 설해지지 않았으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부처가 과감한 수행 끝에 얻은 '심심미증유의 법'을 곧바로 설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원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정법을 가르쳐도 중생이 어중간하게 이해하거나, 의심을 일으켜 오히려 정법을 어기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버릴 위험도 있다.

 

 

◆부처의 지혜는 자비에서 나온다

 

 석존 자신,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한 직후 한때는 법을 설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나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면 중생은 영히 미혹의 어둠 속에 갇혀 버린다. 여기에 인류의 선각자, 석존의 갈등이 있었다. 남모르는 그러한 고충을 극복하고 법을 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틀림없이, 올바르게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석존은 종횡으로 지혜를 발휘하여, 깨달음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까를 고심했다.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그것이 석존의 자비이다. 지혜는 자비에서 생긴다.

 실로 삼승(성문,연각,보살)의 가르침의 위치는 이렇게 정할 수 있다. 부처가 각각의 기근에 맞추어 성문의 길, 연각의 길, 보살의 길이라고 했듯이 개개인에게 적합한 가르침을 설했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부처의 지혜의 문까지 도달하게 하려고 했다. 그것이 이전권교(爾前權敎)의 방편(方便)이다.

 경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의당함에 따라 설하신 바'-중생의 기근에 응하여 적절하게 설한 가르침-라고 한다.

 부처의 진의는 어디까지나 일체중생을 부처로 되게 하는 길, 일불승을 설하고자 했던 것에 있다. 그러나 성문이나 벽지불 등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임시의 가르침에 집착하여 "한사람도 남김없이 전인류를 부처로 되게 하고 싶다"라고 하는 부처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체중생을 부처로 되게 하는 진실한 법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의취는 이해하기 어렵도다'-부처의 진의는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의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처가 일부러 어렵게 설법한 것은 아니다. 결국, 받아들이는 중생측의 '불신(不信)'이나 '집착'등이 있기 때문에 부처의 진의가 난해해지는 것이다.

 마을을 닫아버리면 정론(正論)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잘못된 사상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인생을 파괴해 버리는가.

 

 

◆"부처의 진의를 아는 사람"이란 정법을 유포하는 사람

 

 사실은 삼류의 강적이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것도, 법화경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의취난해), 방편권교에 집착한 데 있었다.

 경문에는 "탁세(濁世)의 악비구는 부처의 방편(方便) 수의소설(隨宜所說)의 법을 모르고 악구(惡口)하며"(개결 443쪽)라고 있다.

 '탁악의 말법의 악승'은 이전권교가 '방편 수의소설의 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런 낮은 가르침에 집착해 버렸다.

 그래서 자신들이 수지한 이전교(爾前敎)를 타파하는 법화경 행자에게 적의를 품고 박해하는 것이다.

 부처의 진의를 왜곡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처의 가르침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박해한다. 어느 시대든 전자는 많고 후자는 소수이다.

 탁악의 사회에서 박해를 하는 쪽은, 법화경 행장의 악구를 퍼뜨려 '악(惡)의 여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의의 사람을 박해하려고 한다.

 이런 전도(顚倒)의 탁세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정의를 끝까지 외쳐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겨서 정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성인 멸후(滅後)에도 닛코상인 오직 한분이 일어섰기 때문에 대성인의 정의가 지켜졌다. 닛코상인이 침묵하셨다면 '오노승(五老僧)의 정의'라는 역사가 만들어져 버렸을 것이다. 따라서 닛코상인은 엄격하리만큼 오노승의 사의(邪義)를 타파하셨다.

 오노승은 대성인의 '의취', 즉 어본불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대성인의 '의취'란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유포하고 말법의 전민중을 행복하게 하는 것 외엔 있을 수 없다.

 오노승은 이 삼대비법을 나타내신 대성인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닛코상인 오직 한분이 대성인에게 상수급사(常隨給仕)하고 함께 난(難)을 견디며 스승의 말씀대로 과감하게 홍교를 전개하셨다. 스승과 함께 마음을 합쳐 싸웠기 때문에 대성인의 '의취'를 알았던 것이다.

 '스승의 마음'이 올바로 전해졌가 아닌가'는 제자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삼대비법을 수지하고 있다고 자칭해도 만인의 행복을 원하는 광선유포를 위한 행동이 없다면 대성인의 의취를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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