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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방편품

이케다 SGI회장의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⑬

by 민간인김대희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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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간파하는 지혜

 

 "온갖 집착을 떨어버리게 했다."

석존은 인연이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여러 가지 욕망, 미혹을 없애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원흉은 여러 가지 일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집착'이란 문자 그대로 '얽매이는 마음'이다. 번뇌나 욕망 등이다. 석존은 이전경에서 불행에 빠진 구계(九界)의 사람들에게 집착을 떨어버리게 하는 길을 가르쳤다. 그것이 "영리제착(令離諸著)(온갖 집착을 떨어버리게 하다)"이다. 그러나 법화경의 마음은 번뇌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묘법을 근본으로 했을 때 번뇌를 그대로 보리(菩提)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을 "번뇌즉보리"라고 한다.

 

 

◆ 어의구전 "이(離)의 자(字)를 명(明)이라고 읽느니라"

 

 니치렌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법화경 약왕품의 "일체의 고(苦)를 떨어버리게 하다"라는 경문에 대해 "이(離)의 자(字)를 명(明)이라고 읽느니라"(어서 773쪽) "이(離)의 자(字)를 '분명히 밝히다'라고 읽는다고 말씀하셨다.

 '온갖 집착을 떨어버리게 한다'란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온갖 집착을 분명히 밝히다'라고 읽는다. 집착을 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간파하여 행복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확실히 집착에서 떠나라고 하지만 떨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떨어버렸다 해도 현실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집착에 휘말리지 않고 사용해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집착을 집착이라고 확실히 간파해가는 것이 중요해진다.

 

 

집착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되다

 

 도다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집착을 집착이라고 확실히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본존입니다. 여러분도 집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도 집착이 있습니다. 모두 집착이 있기 때문에 충실한 인생을 보내는 것이므로 마음껏 장사에, 절복에 집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 그 집착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집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신심입니다. 집착에 이용당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집착을 끝까지 사용하여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고.

 이 집착을 명확히 깨달아 끝까지 사용해가는 경애, 마음껏 집착하여 멋있는 인생을 사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요는 마음껏 번뇌를 불태우고 그만큼 진지하게 제목을 올리고 행동해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번뇌가 도약대가 되어 자신의 성불에 다가서는 것이다. 신심은 올라야 할 산을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산에 도전해 간다. 그 반복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자신만의 작은 번뇌에 사로잡혀 있던 경애에서 이윽고 벗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인류를 위해 라는 커다란 번뇌에 도전할 수 있는 자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도 항상 무엇을 위해 라는 것을 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근본 목적이 결정되어 있으면, 집착을 잘 이용해서 다루게 된다. 모든 것을 행복의 순풍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한 신심이다. 이 법리는 욕망에 치우치고 있는 현대사회의 커다란 지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https://im.newspic.kr/lKHKRTA

 

'우영우' 박은빈이 건넨 인간관계 조언 '화제'··역시 명언 제조기

CG/이포커스 [이포커스 고정현 기자] 우영우 변호사를 연기한 배우 박은빈이 건넨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보그 코리아 공식 유튜브 채널에

im.newspic.kr

본문

所以者何 如來方便 知見波羅蜜 皆已具足

소이자하 여래방편 지견바라밀 개이구족 

 

소이(所以)는 무엇인가. 여래는 방편, 지견바라밀, 모두 이미 구족했다.

 

 

통해

(부처는 여러 방편을 사용해 중생을 인도하고 집착을 떨어 버리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처는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하기 위한 방편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구해설

【여래】 부처를 말함. 깨달음의 완성에 도달한 사람. 여래란 “진여(眞如: 깨달음)에서 와서〈來〉 중생을 가르쳐 인도한다”는 뜻.

【지견바라밀】 "지견(知見)"은 지혜에 의한 통찰력, 깨달음. 지견바라밀은 지혜바라밀을 말함. 대승의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섯가지 수행인 육파라밀(六波羅蜜) 중 제 6으로 들고 있다. 일체 제법(諸法)을 통달하고 사견(邪見)을 없애 진실을 바르게 간파하는 지혜를 얻는 것.

 

 

강의

 부처의 광대한 지혜를 찬탄하는 설법이 계속된다. 지금까지의 부처가 과거에 얼마나 무량한 수행을 해왔는가라는 면에서 부처의 지혜를 찬탄해 왔다. 여기서부터는 그 수행으로 얻은 '민중을 인도하는 지혜의 힘' '부처의 경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전단의 내용에 이어 부처가 여러 인연(내력), 비유로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여 집착을 떨어버리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혀간다. 어떻게 그만한 일이 가능했을까.

 "방편, 지견파라밀"이란 "방편과 지견(지혜)의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파라밀은 도달한다, 완성한다고 한다는 의미이다.

 또 "모두 이미 구족했다"의 "구족"이란 갖추는 것을 말한다. 여러 수행을 완성시켜서 심심(甚深)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오묘한 수단을 갖고 있으며 지혜를 구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적확하게 그 사람에 맞는 지도의 손길을 뻗칠 수 있다.

 이 경문에 계속되는 부분에는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부처는 "무량(無量), 무애(無礙), 역(力), 무소외(無所畏)"라는 지혜의 힘을 갖고 있다고 설해져 있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 회에 말하겠지만, 이러한 것은 부처가 민중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구체적인 활동이다.

 

 

◆ 불법은 "지혜"의 종교

 

 불법은 '지혜의 종교이다. 도다선생님은 자주 "현대인의 불행의 하나는 지식과 지혜를 혼동하고 있는 일이다" "지식이 곧 지혜는 아니다. 지식은 지혜를 여는 문으로는 되지만, 지식 자체가 결 지혜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아무리 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워도 그것이 그대로 장사의 번창으로 이어질 리가 없다. 반대로 학교는 나오지 않았어도 훌륭하게 성공한 실업가도 많이 있다.

 또 육아(育兒)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훌륭한 육아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에 있어서 어린이의 성장은 천차만별이다. 책에 쓰여 있던 것과 다르다고 육아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어머니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지식이야말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면이 강하다.

 그것을 전제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가치'는 생기지 않는다. 행복을 창조할 수는 없다. '지식이 증가했다' 따라서 그것이 곧 '행복이 증가했다'는 것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지식을 활용하는 근본의 지혜가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지만 교육론에서는 자주 '어린이와 같은 눈높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체험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가 백화점 같은 곳에서 막무가내로 '조르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그치지 않는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때는 아무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꾸짖어도 효과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도 함께 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갸웃거리며 울음을 그친다. 그고 나서 조용히 타이르면 의외로 고분고분해진다-라고.

 물론 이 방법이 언제나 통용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마음을 통하게 하려는 부모의 마음에서 나온, 그 사람 나름대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눈높이에서'라는 지식이 훌륭하게 실천적인 지혜로 활용되고 있다.

 어쨋든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를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지식을 위한 지식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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